꿈을 심은 사람들 – Factive story 2

2011년 2월 21일에 페이스북에 쓴 글인데… 2012년 12월 레고켐은 AZ에 기술이전을 하고, 2013년에는 상장을 했다..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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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옛날 영화관에서 꼭 봐야 하던 대한 니유~~~스 한컷(1991년 2월11일) 부터 시작합니다.

(http://film.ktv.go.kr/koreanews/korea_news.jsp?page=25&yearCheck=&searchCategory=&searchText=&selOption=&searchText2=&pageSize=5&subjectID=151000&spanid=&codelist=&orderBy=orderByDate&orderAsc=ASC&orderbyd=&input_sdate=&input_edate=)

내용요약하면 이렇습니다. LG화학 정밀화학연구소의 김용구(?) 박사는 세계최초로 4세대 세파계 항생제를 합성해서 세계적 기업은 글락소에 수백만불의 기술료를 받고 기술이전했습니다. 그리고 김용구(?) 박사의 씩씩한 인터뷰~~~

(김용주 박사님인데 아마 제작 과정에서 이름이 잘 못 들어간 것 같습니다.)

 

김용주 박사님 (현 레고켐 대표이사)김용주 박사님 (현 레고켐 대표이사)

영상에 나오는 머리 까맞고 통통한 김용구(?) 박사님이 지금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벌써20년 전이기에 머리가 희어지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이분의 40대초반부터 머리가 희어졌었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나은것 같기도 합니다. (김용주 박사님께서 저와 계속 교류를 하고 친근하게 지내기 때문에 좀 편안하게 글을 쓰고 있음)

이분을 처음 뵌 것은 1991년 초봄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있었던 한 세미나에서 였습니다. 연사였냐구요? 아니요. 연사분은 지금 화학연구원 원장으로 계신 오헌승 박사님이시고, 김용주 박사님은 그분의 가방모찌로 와서 세미나 전에 슬라이드 (지금의 빔프로젝터의 전신… 슬라이드 필름을 만들어서 한장씩 기계에 넣어서 진짜로 돌리던 시절의 것)를 한장씩 프로젝터에 넣던 분이었습니다.

오헌승 박사님 (현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오헌승 박사님 (전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오헌승 전무님(당시 호칭)이 세미나가 바로 “4세대 세파계 항생제”였습니다. 세미나 도중 오헌승 전무님은 “이 일은 저기 슬라이드로 수고하는 김군(?!?)이 한겁니다.”… 박수 짝짝…. 이렇게 저는 김용주 박사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사실 91년 그 당시 “4세대 세파계 항생제”는 제가 기억하기로 조선일보 사설에도 “이것이 살길이다” 정도의 제목으로 (제 기억에만 의존한 것임) 언급될 정도로 한국 최초의 기술수출 (제약업계 뿐 아니고, 아마 한국 모든 분야에서 최초의 기술수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대한 니우~~스”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LG화학 (LG생명과학의 전신)에 입사한 것이 93년 봄이었으니까 그 때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이 흥분돼 보이고, 한국 그 어디에서도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느끼지 못하던 흥분과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또 팽팽한 긴장도 있었구요.

물론 저는 바이오 쪽이었기 때문에 김용주 박사님 팀과 직접적으로 일하지는 않았지만, 제 친구들과 선배들이 거의 대부분 정밀화학연구소( 현재 LG생명과학연구원 신약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위의 그림 중에 있는 김영관 박사님은 바로 얼마 있다가 홍창용 박사님과 팀을 이루어서 퀴놀론계 항생제를 직접 합성에 성공했던 분이기도 하지요.

좀더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최남석박사님 최남석박사님

G생명과학의 바이오/신약연구는 1980년대 초로 올라갑니다. 당시 LG화학의 CTO 이셨던 최남석 박사님께서 당시 미국에 계시던 조중명 박사님 주축이 되어 Lucky Biotech Corporation (LBC)라는 연구소를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 에머리빌에 차리면서 부터였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당시 합성하시던 분들이 신약은 언감생심… 제네릭이나 다른 연구를 하셨다고 합니다.

조중명 박사님 (현 크리스탈지노믹스 대표이사)조중명 박사님 (현 크리스탈지노믹스 대표이사)

LCB는 당시 최첨단의 유전자재조합 기술을 한건물에 같이있던 Chiron에서 배우면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일들을 했습니다. 지금 LG생명과학이 판매하고 있는 인간성장호르몬 등이 LBC에서 유전자재조합되었습니다.

저는 말씀드린 것처럼 93년도에 입사해서 그 전의 이야기는 어른들과 선배들에게 들어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남석 박사님의 원대한 꿈은 1994년 현재의 LG화학연구원으로 그 모습이 들어났습니다. 당초는 현재 ETRI앞에 있는 작은 규모의 연구소에서 있었지만 세파계 항생제 등에 힝입어 그 당시로는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연구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제가 입사할 때는 그 규모를 보고 정말 입이 쩍 벌어졌었습니다.

94년 당시 LG를 소개할 때는 박사/석사연구원비율을 꼭 강조해야 합니다. 왜냐면 매년 회장보고때 꼭 들어갔었거든요. 1:4 즉 석사연구원 4명에 박사연구원 1명.  전체 연구원수 신약/바이오분야만 230여명.. 그러니까 박사인원만 50여명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최남석 박사님의 꿈의 실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박사님들과 복도에서 만나면 “What’s up” 또는 “What’s new”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김용주 박사님께 들려주신 비사 한건….

최남석 박사님께서 쿠사리(?)먹으며 품의받았던 magnetic stirrer최남석 박사님께서 쿠사리(?)먹으며 품의받았던 magnetic stirrer

연구소 초기…. 마그네틱 스터러 (magnetic stirrer)가 첨단 시험기기였던 시절… 김용주 박사님이 최박사님께 마그네틱 스터러 20여개를 사야겠다고 햇다나요…. 그리고 품의서를 써서 드렸고, 최남석 고문님은 품의를 받기 위해 당시 럭키화학 사장님 (제가 이분 이름은 모름)을 서울가서 뵈었다고 합니다. 거의 1시간 정도를 비싸다느니 이렇게 많이 필요하냐느니 등의 꾸지람을 하시고는 “꼭 필요해?” 라고 물어서 최남석 박사님은 “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날 내려오셔서 김용주 박사님과 술드셨답니다.

김용주 박사님은 제게 최남석 박사님께서 본사에 가서 연구에 필요한 resource를 얻어오기 위해서 참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는 의미로 이야기 해셨지요.

여하튼….

1993-4년 퀴놀론계 항생제가 본격적으로 뜨기 전에 LG 당시 분위기는 선구자들의 기상 (spirit 혹은 upbeat drum 소리)로 가득찼었고, 저는 그런 분위기를 느끼며 첫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김성천박사님 (현 LG생명과학 CTO)김성천박사님 (전 LG생명과학 CTO)

실제 제가 첫 수행했던 프로젝트도 당시 최첨단이었던 AIDS 치료제와 항응혈제 등이었습니다. 제가 관여되었던 (사실 연구초짜였기 때문에 선배들 틈에 끼여서 일했던) AIDS 치료제는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도 아직 AIDS치료제가 없던 시기, 우리 LG는 세계의 Merck, Abbott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했었으니까요….. 1995년 LG의 AIDS치료제 논문이 Nature에 게재되었을 때는 정말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아마 Nature는 국내최초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주 연구자였던 김성천 박사님 (현 LG생명과학 CTO), 그리고협력자였던 김상수 박사님 (제 보스, 현재 숭실대 교수) 그리고 그룹리더셨던 고종성 박사님 (현 Geenosco CTO, 미국) 등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제가 세계적인 무언가의 한 부분이라는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덕분에 저도 Nature 논문에 살짝 이름 올라갔었습니다.

여하튼, 당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홍창용 -남두현 박사님이 함께 했던 퀴놀론계 항생제 프로젝트였습니다.

저는 참 행복한 첫 직장생황을 했다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아직도 그립고 아련합니다.

누가 제게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다면 당시 LG의 분위기를 맛 본 저는 “제 이름은 꿈꾸는 자이고 저의 앞서 가시며 저를 꿈꾸게 하는 분들의 아들이요, 손자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아마 당시 LG에서 신약/바이오 분야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었을 겁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꿈돌이 “퀴놀론계 항생제 LB20304a (당시 Factive의 코드명)”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P.S. 이 글을 빌어, 당시의 그 LG의 열정을 만드신 최남석 고문님과 많은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당시의 그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달려가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과연  제 후배들에게 이런 “열정”과 “꿈”을 심어주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죽음…. Factive story 1

팩티브..

국내 제약업계에서 이 만큼 많이 회자되던 신약 프로젝트도 있었을까?

국내 최초의 FDA 허가 제품. LG생명과학의 모든 것을 걸었던 제품.

수많은 LG생명과학 연구원들과 개발팀원들이 희망을 걸었고, 가슴아프게 했던 제품.

그래서 이젠 증권가에서 이름조차 잘 불려지지 않는 제품.

하지만 이 팩티브 (Factive, 일반명 Gemifloxacin) 이야기를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제 젊음의 한가운데, 그리고 관련된 많은 분들의 중년의 한가운데 불탔던 이름이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긴 이야기를 하나씩 해보겠다.

첫 이야기를 한 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홍창용 박사님, 제게는 과선배님이시고, LG생명과학 (당시 LG화학) 직장 선배셨던 분. 늘 목소리가 아주 작았고, 남자건 여자건 상대방을 “자기”라고 부르셨던 분. 덩치가 그리 크지도 않고, 이야기하길 좋아셨던분. 그리고 LG생명과학과 우리나라 제약업계에서는 Factive의 주발명자 (주발명자라고 하는 이유는 발명에 관여한 유일한 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였던 분…

이분의 부고를 경향신문 (2003년 7월 3일자)은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국내 개발 신약 중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은 호흡기 치료제 ‘팩티브’를 개발한 LG생명과학연구원 홍창용 박사가 향년 43세로 별세했다. 뇌종양 판정을 받고 투병중이던 홍박사는 1일 오후 11시59분쯤 입원중이던 삼성서울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서울대 화학과를 수석졸업한 홍박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 과정을 거쳐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3년 LG생명과학의 전신인 LG화학에 입사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4일 오전 7시30분.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가 있다. 

긴 Factive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고인이 되신 홍창용 박사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오래 기억해야할 분들을 가셨다는 이유 만으로 너무 쉽게 잊는 것 같다.

Factive는 1997년 5월 9일 (영국 시간으로는 5월 8일, 그래서 계약서에는 5월 8일로 되어 있습니다.)에 SmithKline Beecham사와 LG화학 (현 LG생명과학)간에 기술이전계약 (License and Supply Agreement)이 체결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제 생애 최고의 생일이었다.

1999년 12월 15일 미국 FDA에 신약품목허가 (NDA, New Drug Application)신청을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꿈이었고 희망이었고, LG생명과학의 미래는 맑고도 밝았다.

그리고 2000년 12월 18일에 FDA로부터 허가보류통지서(Non-approvable Letter)를 받았다는 통보를 GlaxoSmithKline(SmithKline Beecham과 Glaxo Wellcome사가 2000년 1월 18일자로 합병발표를 했고 회사이름이 GlaxoSmithKline이 됩니다)으로부터 받으면서 Factive는 고난의 길을 가게 되었다.

홍창용 박사님은 Factive가 영광에서 고난으로 바뀌던 과정을 보시던 2003년 초여름…갑자기 어지럼증을 느껴서 병원가서 검사를 받다가 뇌종양으로 판정이 나고 얼마후 돌아가셨다. 43세의 젊은 나이에………

1편은 그분의 아쉬운 죽음만을 기억하며 마칠까 한다. 수줍은 듯한 반미소를 늘 지으시던 그 분을 기억한다……

1997년 봄을 기억하면서 가슴이 뛰는 이유 (KDDF 소식지 2014년 03월 03일 기고문)

KDDF에 기고하였던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원문: http://kddf.org/bbs/bbs.asp?no=28&mode=view&IDX=852&p=1&cateId=39)
작년(2013년)을 기점으로 한국 제약바이오 분야는 30년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한국은 특이하게도 저분자 신약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유전자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을 먼저 시작한 나라이다.  물질특허가 1987년도에 도입되고, 국내 제약사들이 위기를 느끼며 신물질 개발에 착수했는데, 생명공학(유전공학) 붐은 1980년대 초반에 불었으니 말이다.1982년 한국유전공학연구조합이 결성되고 학계와 민간기업들이 주축이 되어 당시 “유전공학”이라고 알려진 단백질재조합 기술을 이용한 유용단백질의 생산에 나섰고, 1983년 12월 31일 제정된 “유전공학육성법”이 요즘 흔히 말하는 바이오의약품 개발을 촉진하는 법적기반을 마련하였으니 한국은 바이오분야에서는 분명 상당히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늘 복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의 바이오의약품의 국내 도입초기에 미국과 국내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계속 활발한 연구개발을 하면서 동시에 초기 한국 신약분야의 역사를 일구어 나갔던 기업인 럭키화학(현, LG생명과학)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였고, 가장 가슴뛰는 시기인 1996-2000년까지 주요 과제들에 관여되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요역할을 하던 많은 분들이 국내 여기저기에서 한국제약바이오의 주축으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상업적인 이유에서 “실패한 신약개발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FACTIVE(물질명 gemifloxacin, 프로제트 코드명: LB20304a) 가 없었다면 국내 신약연구개발의 역사를 쓰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FACTIVE 가 바로 필자가 사업개발을 경험한 첫번째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가장 자랑스럽고 기억에 남는 일이다.

LB20304a 코드명의 뜻은 이러하다.   Lucky Biotech의 20번째 프로젝트의  304째 화합물 중에서 첫번째 염인 메실레이트(mesylate)라는 뜻이다.

LB20304a는 1994년 당시 퀴놀론계항생제 프로젝트 리더인 홍창용 박사와 남두현 박사가 합성팀을 이끌었고,  개발이 진행되어 1996년 10월  임상 1상 결과를 감염증 관련 최대 학회인 ICAAC학회에서 포스터 발표를 하였다.

당시  2002년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던 블록버스터, 오그멘틴(Augmentin)에 대한 후속제품을 찾고 있던 SmithKline Beecham (현GlaxoSmithKline)이 당시 ICAAC 포스터를 보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1997년 1월 4일 대전의 LG화학 기술연구원에서 SmithKline Beecham의 사업개발 및 연구팀과의 첫번째 미팅이 있었다.  당시 SB의 팀은  Ms. Annette Clancy가 대표가 되어 왔고 사업개발 인력,  CMC  관련 인력이 와서 미팅을 진행하였다. LG 화학에서는 현재 종근당 부사장인 김규돈 박사가 사업관련 협상을 총괄하고, 연구소에서 개발을 담당하던 김인철 박사(현 항암신약개발단 단장)가 연구개발 관련 사항들에 대한 협의를 이끌었다. 필자는 김규돈 박사를 도와 사업개발팀원으로 협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90년 한국 최초의 기술이전이었던 3세대 세파계 항생제의 Glaxo 기술이전의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LB20304a의 경우는 전사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특별히 외부 전문가인 오석우 변호사(Jeffrey SW Oh)가 협상 전문가로 함께 참여하였다.

1월 4일 미팅에서는 SmithKline의  역량제시 발표(capability presentation) 로 시작하여 향후 시장 전망 및 매출 추정을 고려한 재무적 조건 의 제시 및 개발 일정을 제시하였다. LG화학은 개발의 주요사항들을 주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발표하였다.

당시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은  LB20304a가 두가지 이성질체의 혼합물인 라세메이트(racemate)였는데 과연 두가지 이성질체가 동일한 약효를 보이는지 혹시나 어느 한 이성질체가 약효가 없거나 대사체가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이런 것이 이슈가 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LG 화학으로서는 재빨리 추가 실험을 해서 확인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당시 PK팀을 이끌었던 이용희 박사와 약리팀을 담당했던 곽진환 박사(현 한동대) 그리고 실험을 담당했던 김무용 박사(현LG 생명과학)의 깔끔한 실험결과 제시로 라세메이트 이슈는 완전히 사라졌다.

1월 4일 미팅 이후,  CMC 관련 현장 실사, 재무조건에 대한 협상, 그리고 계약서 문구 작업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5월 9일 양쪽에서  날인을 하였으니 첫 미팅부터 계약 날인까지 4개월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된 사례였다.

그 과정에서 오석우 변호사의 역할은 매우 컸다. 호칭이 변호사이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investment banking역할을 하여서 재무조건에 대한 분석, 계약서의 주요사항 분석 및 협상까지를 담당하였다.  당시 사업개발팀이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협상이 처음인 관계로 협상관련하여서는 실질적으로 오석우 변호사가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석우 변호사는 이후에도 LG,  유한양행 등의 신약후보물질들을 다국적 제약회사에 라이센싱하는데 관여되었으니,  비연구자로서 한국 신약산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4월 말에 마지막 미팅이 이었는데 필자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경상기술료까지 결정된 후 마지막 협상은 원료의약품  (흔히 API라고 하지만 FDA자료에는 Drug substance라는 용어가 쓰인다)의 상업생산시의 공급가격 문제였다. 계약상  LG화학이 원료의약품을 SmithKline Beecham에게 공급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LG화학으로서도 향후 매출과 이익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었고,  SB입장에는 가격이 높지 않은 항생제의 특성 상 공급가격의 제한이 있는 상황이었기에 상당히 중요한 협상이었다.

그런데 이 협상을 위해 온 사람은 한명… 당시 SmithKline Beecham의 사업개발을 총괄하던 Ms. Tamar Hawson  혼자이었다 (Tamar라는 이름은 성경에 “다말”이라고 표현된 이름이라 필자는금방 유태인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당시의 직함은 Senior Executive Vice President.

협상 테이블의 반대편에는 LG담당자가 5명이 앉아 있었고 사업관련 협상이라 김규돈 박사가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요성 때문에 옆방에는 hotline으로 당시 의약품 및 생활용품사업을 총괄하던 조명재  사장이 서울 본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Ms. Hawson은 가방에서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노란색 노트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하게 된 것은 협상의 내용 보다는 당시 협상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Ms. Hawson 때문이다. 협상의 최고 책임자가 다른 참모도 없이 그리고 첨단 notebook같은 것도 없이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노란 노트패드만 꺼내 놓은 상황 때문이었다. 너무나 프로페셔널하고 효율적인 모습이었고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계속 사업개발 업무를 하면서 해외 업체들을 많이 만나 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최고 임원진들이 고객 혹은 협상파트너와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만나는 등 “전진배치”되어 활동하는 것은 영미권 제약회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대부분 과장, 부장급이 전진배치되고, 임원진들은 추후 보고 받으며 지휘하던 한국적 관행만 알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그후 크리스탈지노믹스에서 사업개발을 하면서 몇번 더 Ms. Tamar Hawson을 보았다. SmithKline Beecham이 Glaxo 에 합병된 후에는 BMS 최고사업개발담당자로 옮겼다가 몇 년 후에 은퇴하여 현재는 투자기관의 자문으로 있다. 본인은 몰랐으리라. 필자에게 전문직으로서의 역할모델이었다는 것을.

가격협상도 상호 이익을 잘 반영하는 방식으로 잘 끝나서 5월 9일 날인을 하게 되었고 5월 16일(영국시간 5월 15일)에 첫 계약금이 입금되어 계약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그날 저녁 필자는 다음날 있을 본인의 결혼식을 위해 부산으로 급히 가야했다.

필자에게는 Factive의 계약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계약서 상의 날인일인 5월 9일이 생일이요, 계약금액이 입금된  다음날이 5월 17일이 결혼기념일인지라 더욱 더 그러하게 되었다.

첫 계약이었던 Factive 계약을 통해서 업무적 성과는 둘째로 하고 좋은 역할 모델이된 Ms. Tamar Hawson을 알게 되었고, 계약과 협상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준 오석우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또 현재 대표적인  바이오전문투자기관인 MPM Capital의 managing director로 있는 Dr. Gary Patou와도 알게 되어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다.

그래서 봄이되면 당시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팽팽한 긴장감과 보람 그리고 흥분들이 느껴지면서 당시 함께 수고하고 고생했던 많은 분들이 생각이 난다.

아마 이런 느낌은 연구원들의 꿈과 희망의 결정체를 들고 기술이전을 시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도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필자도 작은 소망이라면 그때 그 흥분과 서렘을 느끼면서 앞으로 국내 연구진들의 좋은 연구결과를 가지고 좋은 파트너와의 협상 자리에 앉는 것이다.  국내 신약연구개발 관련 역량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보며 이런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